효율과 속도가 지배하는 대량생산의 시대, 이러한 흐름에 맞서 오직 손끝의 집요한 완성도만으로 예술적 저항의 아카이브를 쌓아 올린 여덟 명의 디자이너가 있습니다. 은둔의 철학자 폴 하든부터 해부학적 미학의 정점을 보여주는 캐럴 크리스찬 포엘에 이르기까지, '아티잔'이라는 독자적인 세계를 통해 패션의 잃어버린 본질을 다시 소환하는 8명의 아티잔 디자이너들을 지금 확인해보세요!
캐나다 출신의 폴 한든(Paul Harnden)은 영국 브라이턴을 거점으로 활동하며 현대 패션 산업의 속도에 정면으로 저항하는 인물이다. 그는 복제가 물건의 고유한 ‘아우라’를 훼손한다는 벤야민의 철학을 몸소 실천하듯 온라인 판매와 세일, 연예인 협찬을 철저히 금지한다. 공식 홈페이지조차 해독 불가능한 기호로 가득하며 그의 행보는 ‘패션계의 설표’라 불릴 만큼 신비주의에 싸여 있다.
100년이 넘은 영국의 직조기로 짠 전통 트위드와 실크 그리고 특유의 거친 가죽을 사용하는 그의 컬렉션은 마치 19세기 빅토리아 시대의 유물을 발굴해낸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금속 지퍼 같은 현대적 부속품을 배제하고 전통적인 단추 방식을 고수하며 시간이 흐를수록 착용자의 몸에 맞춰 변해가는 주름과 질감을 예술의 영역으로 끌어올린다. 유행이라는 소음을 거부하고 느림의 미학을 지켜내는 그의 고집은 배우 제레미 스트롱(jeremy Strong)이나 디자이너 존 갈리아노(John Galiano) 같은 거장이 그를 단순한 디자이너 이상의 예술가로 경외하게 만드는 이유다.
이탈리아 로마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카림 파레스(Karim Fares)는 의류를 단순한 소모품이 아닌 과거의 기억을 기록하는 ‘연구 프로젝트’로 취급한다. 그는 1920년대 빈티지 의류 태그에서 발견한 실존 인물 ‘J.M. Ribot’의 이름을 빌려, 벼룩시장에서 수집한 앤티크 직물과 단추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었다. 오버록 기계조차 사용하지 않는 전통적인 슬로 스티칭 기법은 현대 사회의 대량 생산 방식에 대한 조용한 반기이며 모든 공정에서 수작업의 흔적을 투명하게 드러낸다.
그는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영화적 서사와 보르헤스의 시적 영감을 옷 속에 투영하여, 세월이 만든 얼룩과 흠집을 가려야 할 결점이 아닌 시간의 선물로 받아들인다. 최근에는 과거의 희귀 원단을 복각하거나 고유의 자카드 직물을 직접 개발하는 등 소재의 깊이를 더하고 있다. 상업적인 마케팅이나 소셜 미디어의 화려함 대신 옷 본연의 촉감과 시각적 아름다움으로 소통하는 그의 태도는 시대를 초월한 아티잔 패션의 정수를 보여주며, 입는 이에게 허구와 현실이 교차하는 문학적인 경험을 선사하고 있다.
오스트리아 출신의 캐럴 크리스찬 포엘(Carol Christian Poell)은 아티잔 패션의 영역을 넘어 현대 복식사에 가장 급진적인 질문을 던지는 인물이다. 가죽 제품 공장을 운영하던 가문에서 성장한 그는 소재에 대한 해부학적 이해를 바탕으로, 정교한 테일러링과 파격적인 실험주의를 결합한다. 그의 작업은 삶과 죽음, 부패와 재생이라는 심오한 주제를 관통하며 실제 인체의 치아와 뼈를 장신구에 세공하거나, 말의 털과 혈액을 사용하여 의류를 제작하는 등 소재의 물성을 극한으로 몰아붙인다. 특히 가죽을 액체 상태로 가공하거나 밑창에서 고무가 흘러내리는 듯한 드립 스니커즈는 패션이 조형 예술로 승화된 대표적인 사례다.
2004년 밀라노 운하에 모델들을 시체처럼 띄워 보낸 프레젠테이션 ‘Mainstream-Downstream’은 상업적 패션 시스템에 대한 거대한 저항이자 예술적 선언으로 남아 있다. 데미안 허스트의 해체적 미학을 연상시키는 그의 옷은 단순한 착용을 넘어 인간 본연의 생명력과 소멸의 과정을 성찰하게 만든다. 현재는 기성복 생산보다 맞춤 제작에 집중하며, 자신만의 독보적인 은둔의 아카이브를 더욱 공고히 구축하고 있다. 단순히 물건을 만드는 것을 넘어 사용자가 자연을 경험하고 사랑하며 그 안에서 함께 살아가는 ‘공생’의 가치를 제안한다.
이탈리아 로마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마우리치오 아마데이(Maurizio Amadei)는 정식 패션 교육을 받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만의 독창적인 의복 구성 방식을 정립한 아티잔 패션의 선구자다. 그의 디자인 철학은 ‘SKINS’라는 키워드로 요약되는데, 이는 인간의 몸을 모든 설계의 근간으로 삼는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특히 그는 기존 유럽식 패턴 제작의 틀을 깨고 절개와 솔기를 최소화하는 ‘원피스(One-Piece)’ 프로젝트를 통해 업계에 거대한 충격을 안겼다. 한 장의 천이나 가죽을 복잡하게 재단하는 대신 입체적으로 접고 몰딩하여 몸을 감싸는 그의 방식은 의복이라기보다 ‘입는 조각’에 가깝다. 모든 제품은 로마에 위치한 그의 아틀리에에서 숙련된 팀원들의 손을 거쳐 소량 생산되며 원단이 겹쳐지며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시그니처 ‘+’ 모양의 교차점은 장인 정신과 미니멀리즘의 정수를 상징한다. 화려한 장식 대신 패턴 속에 숨겨진 정교한 포켓과 이음새 없는 가죽 신발 등은 아티잔 장르가 도달할 수 있는 가장 순수한 형태적 미학을 보여준다.
모리치오 알티에리(Maurizio Altieri)가 1996년 이탈리아 페루자에서 설립한 카르페 디엠(Carpe Diem)은 현대 아티잔 및 아방가르드 패션의 근간을 세운 전설적인 브랜드다. '현재를 즐기라'는 이름의 의미처럼, 알티에리는 대량 생산의 논리를 거부하고 실험적인 장인 정신을 통해 옷을 하나의 예술품으로 승화시켰다. 이들은 말가죽, 소가죽뿐만 아니라 아나콘다와 같은 희귀 소재를 혁신적인 방식으로 가공하여 독보적인 질감을 창조해냈으며 무채색의 절제된 톤 안에서 소재 본연의 힘을 극대화했다. 특히 불완전함 속에서 아름다움을 찾는 일본의 '와비사비' 철학을 수용하여 비대칭적인 설계와 마감되지 않은 거친 밑단, 그리고 시간이 흐름에 따라 착용자의 흔적이 새겨지는 변화의 과정을 미학적으로 정립했다.
2006년 브랜드를 해체했음에도 불구하고 카르페 디엠의 정신은 함께했던 마우리치오 아마데이(m.a+), 시모네 체케토(A1923), 루카 라우리니(L.U.C) 등 당대 최고의 아티잔들에 의해 오늘날까지도 계승되고 있다. 단순한 패션 라벨을 넘어 하나의 거대한 아방가르드 운동을 일으킨 이들은 지금도 전 세계 컬렉터들에게 아티잔 장르의 영원한 성전으로 추앙받고 있다.
폴 한든의 핵심 파트너로 활약하며 의류 라인을 구축했던 엘레나 도슨(Elena Dawson)은 2006년 자신만의 미학적 세계를 완성하기 위해 독립했다. 그녀의 작업실은 14세기 건축물 안에 자리 잡고 있으며 그곳에서 그녀는 시간을 거스르는 ‘유령 같은’ 의복을 빚어낸다. 도슨의 옷은 빅토리안 시대의 낭만주의와 해체주의적 펑크가 기묘하게 공존하는 형태를띠는데, 특히 제작 공정 중간에 의도적으로 멈춰 선 듯한 ‘미완성’의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특징으로 마감되지 않은 솔기와 길게 늘어진 실밥은 옷에 기묘한 생명력과 역사성을 부여한다. 이는 어린 시절 할머니의 앤티크 재봉틀을 ‘타임머신’이라 믿었던 그녀에게 옷은 죽음과 의례, 그리고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한 탐구다.
영국산 울, 아일랜드 리넨, 중국 실크 등 천연 소재만을 고집하며 모든 피스를 아틀리에 내부에서 직접 손으로 제작하는 그녀의 방식은 상업적 패션이 잃어버린 ‘손의 온기’와 ‘순수한 예술성’을 상징. 그녀의 옷은 입는 이로 하여금 과거와 현재가 중첩된 판타지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듯한 신비로운 경험을 선사한다.
한국 출신의 디자이너 박고은이 이탈리아 페루자에서 전개하는 폼 덱스프레시옹(Forme D'expression)은 ‘침묵의 미학’을 대변하는 브랜드다. 도나 카란(Donna Karan)의 메인 라인 디자이너를 거치며 거대 패션 하우스의 정치적, 상업적 시스템에 회의를 느낀 그녀는 자신의 창의적 무결성을 지키기 위해 ‘Factory of Faith’라는 회사를 세우고 독립했다. 그녀의 작업은 화려한 로고나 자극적인 디자인 대신 옷 본연의 구조와 소재의 질감을 통해 나직하지만 힘 있는 목소리를 낸다. 하루의 80%를 패턴 제작에 몰두할 만큼 정교한 설계에 집착하는 박고은은 이탈리아, 영국, 독일의 전통 패턴 공법을 끊임없이 연구하며 생산자와의 긴밀한 소통을 위해 공방 근처로 거처를 옮길 만큼 완벽주의적인 태도를 고수한다.
남성복에서는 성숙하고 지적인 태도를 바탕으로 한 ‘편안한 타임리스(Timeless)’를 추구하고, 여성복에서는 보다 직관적이고 시적인 볼륨감을 통해 로맨틱한 환상을 조각한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섬세한 다트 처리와 인체공학적인 소매의 곡선 등은 옷을 직접 입었을 때 비로소 그 진가를 발휘한다. 유행이라는 소모적인 경쟁에서 벗어나 장인들과의 깊은 유대 속에서 탄생하는 그녀의 옷은, 빠르고 복잡한 세상 속에서 우리가 왜 다시 ‘본질’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지 조용히 웅변한다.
2024년 서울에서 최무선과 정성학에 의해 설립된 모서리(Moseori)는 ‘호기심을 잃지 않는 소년’이라는 핵심 가치를 바탕으로 전개되는 독립 패션 브랜드다. 이들은 주변의 익숙한 소재들을 끊임없이 탐구하고 그 이면에 숨겨진 디테일을 발견하여 기존의 미적 가치를 새롭게 재정의하는 과정을 즐긴다. ‘하우스 오브 모서리’라는 창의적인 공간 안에서 이루어지는 이들의 작업은 대량 생산의 보편성 대신 개별 제품이 지닌 고유한 개성과 세밀한 완성도에 집중한다.
전통적인 장인 정신을 현대적인 관점으로 재해석하여 의복에 투영하며, 착용자로 하여금 세상을 향한 무한한 경이로움을 잃지 않도록 독려한다. 모서리의 디자인은 정형화된 틀에서 벗어나 익숙함과 낯섦 사이의 경계를 탐색하며, 단순한 의류를 넘어 하나의 예술적 오브제로서의 가치를 지향한다. 이제 막 첫발을 내디딘 신생 브랜드임에도 불구하고 아티잔 패션의 본질인 ‘손의 가치’와 ‘개인적 서사’를 서울이라는 현대적 맥락 안에서 구현해내며 자신들만의 독보적인 영역을 구축해 나가고 있다.